헤아려 본 슬픈

Joshua/서평 2009.11.05 댓글 Joshua95

헤아려 본 슬픈 (A Grief Observed)
- C.S.루이스, 강유나 옮김


p.21
슬픈은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깍는 일조차 하기 싫다. 내 뺨이 텁수룩하건 매끈하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p.22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그러나 다른  모든 도우이 헛되고 절박하여 하나님께 다가가면 무엇을 얻는가? 면전에서 쾅 하고 닫히는 문, 안에서 빗장을 지르고 또 지르는 소리. 그러고 나서는, 침묵. 돌아서는 게 더 낫다. 오래 기다릴수록 침묵만 뼈저리게 느낄 뿐. 창문에는 불빛 한 점 없다. 빈집인지도 모른다. 누가 살고 있기나 했던가? 한때는 그렇게 보였다. 그때는 꼭 누가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은 정말 빈집 같다. 지금 그분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왜 그분은 우리가 번성할 때는 사령관처럼 군림하시다가 환난의 때에는 이토록 도움 주시는 데 인색한 것인가?


p.23
내가 무서워하는 결론은 "그러니 하나님이란 결국 없는 거야"가 아니라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실체인 거야.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이지 마" 인 것이다.


p.43
나는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언제든지 다른 죽은 사람들을 위해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H를 위해 기도하려고 하면 멈칫 한다. 혼란과 어리둥절함에 휩싸인다. 나는 그녀가 이제 살아있는 실체가 아니라는 점을 섬뜩할 정도로 느끼고 있으며, 텅 빈 진공에다 대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p.46
내게 종교적 진리에 대해 말해 주면 기쁘게 경청하겠다. 종교적 의미에 대해 말해 주면 순종하여 듣겠다. 그러나 종교적 위안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라. "당신은 모른다"고 나는 의심할 것이다.


p.62
오직 극심한 고통만이 진실을 이끌어 낼 것이다. 오직 그러한 고통 아래에서만 그는 스스로 진신을 발견할 것이다. 만약 내 집이 카드로 만든 것이었다면 한방에 빨리 날려 보내는 것이 더 좋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고난을 겪음으로써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의 가학적인 신이나 생체실험하는 신 따위는 불필요한 억측에 지나지 않게 된다.


p.64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가 수의사인지 아니면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p.68
그러나 이토록 극단적인 고통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가? 스스로 선택할 일이다. 고통은 일어난다. 만약 그 고통이 불필요한 것이라면, 신이란 존재하지 않거나 악한 존재일 것이다. 만약 선한 신이 계시다면, 이러한 고통은 필요한 것이다. 적당히 선한 초월자라 하더라도, 고통이 필요 없을진대 그저 고통을 주거나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니 나는 그분이 두렵지 않아"라고 말하는데, 이는 무슨 의미인가? 생전 치과에도 안 가 보았단 말인가?


p.70
"슬픔을 벗어났군. 이제 아내를 잊어버렸어"
그러나 실상은 '슬픔을 일부 벗어났기 때문에 그녀를 더욱 잘 기억하는 것이다..'


p.71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인지 모른다. 점차적으로 나는 문이 더 이상 빗장 걸려 닫혀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되었다. 문이 내 면전에서 쾅 하고 닫혀 버린 것은 정작 나 자신의 광적인 요구 때문이었던가? 영혼 속에 도와 달라는 외침 말고 아무것도 없을 때에는 하나님도 도와주실 수 없는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닥치는 대로 붙잡고 거머쥐니 도와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마도 반복된 외침 때문에 우리 귀가 어두워져 정작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79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 '지금은 더 나아졌다'고 느끼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동시에 부끄러운 느낌도 들고, 왠지 불행을 계속 간직하고 조장하며 연장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사로 잡히기도 한다....그리고 확신하건대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 뒤에 숨은 의미는 무엇일까? 틀림없이 허영심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게다.


p.87
나는 내가 어떤 상태를 묘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것은 지도가 아닌 역사서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임의의 어느 지점에서 그 역사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영원히 멈출 이유를 찾지 못할 것 같다.


p.106
"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
그녀는 미소 지었으나 그 미소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의 샘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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