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이야기

Joshua/단상 2012.07.31 댓글 Joshua95

   나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모릅니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돌아가셨지요. 아버지 10살 때라고 하니 아버지 또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으실 겁니다. 하지만 종종 할아버지에 대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재미 있습니다. 그렇게 들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적어 봅니다.

   할아버지는 형제간 중에는 똑똑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면장이셨던 증조 할아버지의 세째 아들로 아들 중에서는 머리가 좋고 영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당시에는 흔하지 않게 이리 농림학교를 졸업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농업이 천대 받는 직업이지만 당시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시골 사람 치고는 꽤 높은 학력이었겠지요.

   이리 농림학교를 졸업하신 할아버지는 사방관리청에서 일을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는 일제 시대이기 때문에 사방관리청에는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이 섞여서 근무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방관리청에 함께 근무하던 어느 일본인이 물건을 잃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할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지면 이 조센징이 훔쳤을 거라고 윽박 질렀다지요. 느닷 없이 당한 봉변에 할아버지는 당황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였겠지요. 그렇게 하루가 지난 다음날 할아버지는 출근한 후 갑작스레 물건을 잃어버렸다고 소리지르고 어제의 그 일본 사람에게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어제 당한 그대로 온 몸과 호주머니를 뒤지면서 내 물건을 찾겠노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언쟁이 일고 급기야 몸싸움으로 번지더니 한순간 할아버지가 괭이를 들고 일본인을 향해 휘두드려 합니다. 괭이를 든 할아버지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키고 괭이를 집어 던집니다. 그 길로 직장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약간은 과장이 되었을 법하지만 할아버지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할아버지는 형제간에도 신세 지는 것을 못 참으셨다고 합니다. 어느날엔가 아버지와 형제들이 친척 집 감나무에서 떨어진 감을 주어 먹는 것을 보시고 부르셔서 한참을 훈계하셨다고 하지요. 그 일이 있고 나서 할아버지는 어디선가 각종 과실의 묘목을 구해와서 집 근처를 빙 둘러 심어주셨다고 합니다. 감나무도 한 종류의 감이 아니라 각 종류의 나무를 한두 그루씩 심으셨다고 합니다. 할머니께도 절대 다른 집 과실이나 곡식을 줍지 말라고 다그치셨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수십년 지난 후 제가 그 집에 살때에도 튼실한 감나무와 호두나무, 추자나무 등에서 열매를 따 먹었는데 할아버지 덕을 손주까지 본 것이지요.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아쉬움이 없었는데, 아버지의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한번 즈음 할아버지를 뵙고 싶어집니다. 그 시대를 살아간 할아버지는 손주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주셨을까요. 엄하신 할아버지였을지, 마냥 부드러운 할아버지였을지, 그냥 재미없는 고지식한 분이 셨을지 새삼 궁금해 집니다. 웬지 푸근하고 조근조근 이야기 잘하는 할아버지 였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모두 그렇게 이야기 즐겨 하시는 분들이니 말입니다.

 - 2012.07.31 Joshua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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