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부모님은 오이 하우스를 하셨습니다. 당시 시골 초등(국민)학교에서는 토요일이면 마을별로 운동장에 모여서 줄을 맞춰 하교를 하였습니다. 토요일 아이들과 줄을 서서 집으로 돌아오면 가방을 두고 집 옆의 하우스로 향하곤 했습니다. 점심 시간 즈음이면 오이를 플라스틱 박스에 잔뜩 수확을 해 두시고 라디오를 들으시며 정식으로 종이 상자에 포장을 하고 계실 즈음입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묵직한 성우인 듯한 목소리와 경쾌한 음악, 거기에 맞추어 즐거이 부르던 아버지의 휘파람이 생각납니다.
대외적으로도 여러 활동을 하셨던 아버지셨기에, 종종 어머니께서는 혼자서 하우스 일을 도맡아 하시곤 했습니다. 그럴때면 어머니의 말 동무 역할을 제가 주로 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끊이질 않고 계속되지요. 막내 아들의 조잘거림이 어머니에게는 힘든 일을 덜어주는 좋은 활력소였을 것입니다.
그런 여느 어느 날, 오후 느지막히 하우스를 들어섭니다. 오이 고랑 사이를 한참을 들여다 보고서야 어머니를 발견합니다. 그날도 늦은 오후였지만 어머니는 홀로 점심을 못 드시고 일을 하셔야 되었나 봅니다. 나를 발견한 어머니는 아직 어린 초등학생 아들에게 라면 하나 끓여달라고 심부름을 보내십니다.
막중한 임무를 맡은 어린 아들은 진지하게 집으로 향하여 라면을 끓입니다. 친구들과 라면을 부셔먹기도 하고 끓여먹기도 하기를 자주 하였던 차였기에 어렵지 않게 라면을 끓였지요. 문제는 수십 미터 되는 하우스까지의 배달이 문제입니다. 뜨거운 라면을 들고 하우스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조심스러운 일이었지요. 배가 고프실 어머니를 생각하여 조심히 라면을 들고 하우스로 향하였습니다. 어린 초등생 아이가 어머니를 위해 라면을 들고 조심스레 논길을 걷는 모습을 생각해 보노라면 지금도 미소 짓게 됩니다.
하지만, 그때는 얼마나 진지하고 긴장되는 순간이었을까요.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서 마침내 비닐 하우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와 라면을 들어서 어머니를 계신 고랑을 찾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어머니를 향하여 냄비를 들고 안도의 발걸음을 옮기던 중, 아차 그만 발 앞의 물 호스를 보지 못하고 걸리고 말았습니다. 약간 흔들린 정도가 아니라 그만 작은 두 손으로 붙든 냄비를 통째로 땅위로 쏟고 맙니다. 하우스 안에는 수시로 물을 주기 위해서 여러 호스들이 늘어져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쏟아진 라면을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그렇게 조심히 왔는데 너무 허탈해서 눈물이 나고, 배고프신 어머니께 혼날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납니다.
한참을 쏟아진 라면을 쳐다보며 어찌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어머니께서 고랑 일을 끝내고 다른 고랑으로 옮기시던 중 나를 보십니다. 라면을 드시러 오시던 중 쏟아진 라면을 보신 어머니. 어머니 심부름 하나 못했다고 자책하고 어머니께 혼난 것을 예상하며 어머니를 기다립니다.
"다치지 않았냐?"
어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부드러운 미소로 물어보십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물음입니다. 주리시며 일 하는 어머니를 위해 라면 하나 끓여오라고 했더니 오히려 하우스 바닥에 라면을 쏟아서 더 일을 만들어버린 아들에게 그 부드러운 말 한마디는 너무도 예상 밖이었던 거지요. 그렇게 싱겁게 사건이 마무리가 되었지만 가끔씩 그 사건이 내 기억 속에서 떠오르게 됩니다.
이 사건을 기억하고 되뇌이다 보니 "뜻밖의 용서"라는 문구가 생각납니다. 초등학생 어린 아이였던 나에게 어머니의 그 부드러운 물음은 전혀 예상도 못한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가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감사하게 됩니다. 아들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용서를 하신 분 또한 이런 뜻밖의 용서를 하셨습니다.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진노와 무시한 형벌을 예상하였는데 느닷없이 "내가 대신 짊어져주마!" 하십니다. 성나고 일그러진 얼굴을 예상하였는데 너그럽고 부드러운 미소를 빙긋이 웃으십니다. 이 일이 생각날 때면 어린 시절 어머니의 그 용서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겹쳐서 보이곤 합니다.
- 2012.07.31 Joshua95
'Joshua >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착하고 무지한 기독교인 (0) | 2012.12.26 |
---|---|
할아버지 이야기 (0) | 2012.07.31 |
의미있는 삶 (0) | 2012.07.25 |
믿음이란 (0) | 2011.11.02 |
우리들의 진리 실험 이야기 (0) | 2011.10.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