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책을 읽다가 '리영희'라는 걸출한 인물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가 최근 강준만 교수가 쓴 "한국 현대사의 길잡이, 리영희" 라는 책을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그의 업적 만큼이나 그의 삶의 자세가 귀감이 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의 모토는 "검소한 생활, 고매한 정신 (simple life, high thinking) 이었습니다. 최근 제 나이가 나이인 만큼(^^;) 인생의 기준에 대한 고민이 많은데, 그러는 중에 참으로 멋진 모토를 가지고 살아가는 분을 만나게 되어 행운이었습니다.
최근 저는 친한 지인들과 만나게 되면 언제나 경제적인 문제나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열망들에 대하여 많이 얘기하게 됩니다.특히나 경제적인 문제에 관한한 저는 참으로 문외한 입니다. 누구는 주식을 해야된다 누구는 집을 사야한다 등등 주위의 조언은 많지만, 투자할 돈도 없거니와 그러한 투자에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다 나만 시대에, 아니 정확히 친구들의 부의 수준에서 떨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됩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부를 가지고 이 삶을 살아야 하는가가 지금 저의 단편적인 고민입니다. 누군가는 '청부' 가 되라 하고, 누구는 '청빈'하게 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제는 내 스스로가 그 기준을 정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한국의 진보 세력의 바람직한 기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중간에서 약간 좌' 가 바람직하다고 했다고 합니다. 이 답변을 이용하여 제 스스로에게 '내 삶에서 경제의 바람직한 기준' 에 대한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중간에서 약간 하' 정도로 기준을 잡아보았습니다.
물질이 부하다고 무조건 행복하지는 않다는 것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저 같이 연약한 사람은 물질이 풍족해지면 단번해 거만해질 여지가 충분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물질이 없어지면 한없이 열등해질 사람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성인들은 한푼도 없는 극빈의 삶 조차도 기꺼이 헌신했다고 하지만, 그렇기에는 제 스스로가 너무도 물질적인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스스로가 위축되고, 괴로워할 범인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그래서 이 우유부단함을 섞어서 잡아본 것이 '중하'입니다. '중하' 정도면 하나 하나 이루어가는 기쁨이 가장 큰 수준일 듯 합니다. 그 수준을 넘어서면 이제는 물질에 대한 감사나 기쁨이 금방 수그러들것만 같습니다. 본인 스스로에게 그 감사와 기쁨이 없으므로 베푸는 것에 대한 중요함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좀 더, 좀 더'를 외치면서 쌓아올리려고만 할 것입니다. 그러한 풍족함에서 오는 불만보다야 가난함에서 오는 감사가 훨씬 값진 인생일 것입니다.
From Joshua(0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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